Art 2000년 2월호

Art 2000년 2월호 – focus : 박 현주전 1999.12.21~2000.1.7 금산갤러리

 : 강태희 (미술사가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황금큐브의 () ()
 

화가들이 사각형이라는 지지체(support)를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회화사적으로 사각 형태 자체에 대한 천착은 모더니즘의 진행과 궤를 같이 해왔다. 그것은 큐비즘의 사각 지지체에 대한 조응을 단초로 해서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을 거쳐 격자(grid)의 행진으로 가시화 되었다. 여기에 재스퍼 존스나 프랭크 스텔라 등이 개입하여 지지체의 형태와 그 위에 그려지는 형상을 겹쳐 하나로 압축시킨 것이 미니멀리즘이다. 이 과정에서 미니멀 조각은 회화에서 오브제로 건너가면서 표면에 남아 있던 최소한의 표정까지도 소거, 객관성-엄밀성-익명성 등을 시대의 새로운 기치로 삼았다. 미니멀리즘은 승승장구 했고 입방체가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사각형과 상자의 행진은 한치의 위축됨 없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이름의 젊은 화가 박 현주가 출발한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사가형을 지지체로 삼고 그 측면을 키움으로써 도널드 저드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수한 물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서 끝난다. 왜냐하면 그의 상자는 금속이 아닌 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에 상당한 시간과 노동이 소요되는 전통기법인 템페라 물감과 금박을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굳이 중세 이콘화의 재료와 기법을 되살리는 것은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자 더 나아가서는 회화의 가능성을 근본부터 재검토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는 모더니즘과 평면 또는 오브제라는 이슈에 대한 관심이 마침 새롭게 접하게 된 템페라 기법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결합된 결과이다.

작업 자체는 지지체의 준비와 화면채색 그리고 측면의 금박작업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됫박 형태의 나무상자-동물성 아교-아사천-젯소-템페라 물감 등을 재료로 삼고 있다. 덧칠하고 연마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은 통상적인 미니멀 조각의 기계적인 공정과는 의도적으로 상치된다. 또한 측면 역시 점토를 깔고 마노로 연마하여 광택을 낸 다음 금박을 입히고 경면이 정반사를 일으키도록 다시 연마한 것으로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수작업이 요구된다.

곱게 연마된 지지대 위에 템페라를 여러 번 반복해서 칠한 화면은 반복된 줄무늬로 분할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빗살무늬의 붓의 궤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미니멀 상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굳이 비교하자면 거미줄 같은 미세한 연필 드로잉이나 보일 듯 말 듯한 미미한 색조의 변화를 구사하는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작업과 다르고, 또 밀랍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미묘한 색감을 만들어 낸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의 작업과도 다르다. 이는 마틴이나 마든이 보여준 극도의 절제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화가의 손이 그 알리바이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상자를 둘러싼 광배의 존재이다. 박현주 작업의 요체는 미니멀 상자에 어울리지 않는 감각적 화면과 그를 둘러싼 금박의 반사광에 있다. 저드가 직육면체의 ‘서랍’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빛과 그림자의 신비한 효과를 끌어냈다면 <내면의 빛>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황금의 광원을 두른 미니멀 상자들인 것이다.

전통 이콘화에서 금박은 성인(聖人) 이미지의 배경이 됨으로써 그림을 성역으로 편입시키는 데 비해 박현주가 이를 측면으로 보낸 것은 회화를 세속의 영역으로 되돌리고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금박은 앤디 워홀의 황금 마릴린 먼로 상과도 연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먼로를 둘러싼 값싼 황금 물감이 그의 대중적 위상을, 이를테면 성과 속의 갈등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면 박현주의 금박은 본인이 의도한 대로 쉽게 속화되지 않는다. 우선 황금은 천민자본주의의 오랜 세속화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그 광채의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잃지 않은 광물이다. 더구나 이들은 적절한 반사를 일으키도록 연마되었고 그 배열도 단순반복보다는 사다리꼴이나 원형 등으로 무리지어 있어 빛을 상호반사하면서 일루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섣부른 성과 속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있으며, 아우라는 거부되기보다는 머물러 있음으로써 풍부한 표정과 음색으로 ‘불온하게’ 속삭이고 있는 화면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검정 큐브의 이런 난처함이 백색 장방형 큐브로의 변화를 유도했는 지도 모른다. 최근작에 속하는 이들 작품은 그 길이도 불규칙적인데 붓자국과 줄무늬가 사라진 백색 화면은 더욱 촘촘해진 반사광과 더불어 실물과 일루전의 구별이 어려운 빛의 덩어리가 되어 있다.

포화 상태에 이른 미니멀리즘에 박현주의 작업은 하나의 의미있는 뒤틀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그 상자를 더욱 비워 갈지 아니면 채워 갈지에 대한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