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er Light에 관하여

2002/9

1998년 이후의 작업 시리즈인 Inner Light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자세를 다루고 있다. 작업과정에서 나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삶(life)’ 이라는 문제이다. 작품의 큰 테마를 이루는 ?삶?은 생(生)과 사(死),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등의 상반되는 요소들이 함께 뒤섞여져 있는 것으로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삶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볼 때 우리는 삶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감당해 내기 어려운 요구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과 환희와 행복감을 맛보게 하기도 하는 어찌 보면 종잡을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업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이러한 불명료하고 부조리한 ?삶?과 직시하면서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삶 그 자체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의미에서 작업의 시간은 내게 있어서 나를 반추해 보는 시간이리라.

내가 6년간 적을 두고 있었던 동경예술대학의 유화기법재료연구실은 한 장의 그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 되는가 라고 하는 회화의 재료와 기법의 측면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실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서구의 전통 회화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화집에서만 보아왔던 옛 거장들의 작품을 이론과 실천의 입장에서 습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성상화(聖像畵)의 모사 실습을 계기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되었다.  성상화 에서 받은 첫 인상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옛것 속에서 느낀 참신함이었다. 그리고 이 참신함이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해 가는 가운데 나의 화풍은 크게 변화했다. 참신함이란, 이제 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빛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빛의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빛을 쫓아가는 나의 작업 방향은 곧 나 자신을 찾아 헤매는 자아탐구의 과정으로 이어 졌으며 이것은 곧,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데 어울려진 우리의 삶을 빛이라는 하나의 큰 물줄기로 이어가고자 하는 나의 삶에 대한 애착임과 동시에 삶에 대한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내적인 빛 Inner Light>은 빛의 시각적 현상에 관한 내용이다. 일류젼이 회화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내적인 빛 Inner Light>은 일류젼을 그 밑바탕에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일류젼은 흔히 회화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일류젼이 아니라 “우연히” 나타난 환영의 세계이며, 빛의 물리적 현상에 의한 일류젼이다. 여기서 현상이라는 말은 본질의 외면적인 드러남을 말한다. <내적인 빛 Inner Light>에서의 빛의 시각적 현상은 물질(material)의 범주를 넘어선 세계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것은 빛의 일류젼을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시각이라는 감각은 단순히 본다라는 행위를 넘어서고 있다. 작품 <내적인 빛 Inner Light>은 보여지는 대상물을 통해서 현실에 속한 대상물의 공간을 넘어선 환영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으며 환영의 공간속에서 나는 생명을 암시하는 듯한 강한 빛에의 집착을 느끼는 자신과 만난다. 생명에 대한 빛과 맞닥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옭아메는 모든 사상이나 이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하면 현실과 비현실, 물질과 정신,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 사로 잡히지 않고 우리 앞에 보여지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순(純)시각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생명의 빛에 주목하면서 일류젼의 공간을 만들고 회화에로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아갈 작정이다. 작품의 제작은 생명의 빛을 지향하는 일임과 동시에나에게는 살아가는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토 요시오 갤러리 KAZE

갤러리 KAZE,osaka
박현주  INNER LIGHT2002.6.10-22
Independent Curator, KATO Yoshio
 
FIFA월드컵의 개최를 계기로 금년 2002년은 이웃나라 한국과의 다양한 한일문화교류가 일본 전역을 걸쳐서 활발히 열리고 있다. 이 곳 오사카에는 한일 문화교류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박현주의 ‘INNER LIGHT’전시가 열리고 있다.

작년 봄, 나는 전시회의 기획준비로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한국 작가들의 작업실을 둘러 보게 되었다. 박현주의 작업실 방문이 스케쥴의 마지막이었다. 당시 박현주는 유창한 일어로 나를 맞이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는 일본에 건너간 한국 유학생으로 1996년부터 동경예술대학대학원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작업실 바닥에는 몇 개의 나무 상자가 놓여져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상자는 회화작품인지 조각 작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본 인상으로는 그림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조각 작품으로 보아도 무관하게 보였다. 나무상자의 크기는 어느것도 모두 23×23×10센티의 직방형이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표면에는 고전기법의 하나인 탬패라물감으로 섬세한 줄무늬가 그려져 있어 추상회화의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무상자의 네 측면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나무상자는 몇 개가 한조가 되어 벽면 위에 걸리는 식이 되는데 이때 놀랍게도 오브제 측면의 금박면은 조명에 의해 난반사를 일으키게 되면서 시각적 효과를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이 오브제는 물질적인 조각과 광학적 효과를 지닌 회화가 한데 어울려져 촉각적이면서도 시각적인 예술 작품으로 변모하고 있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황금의 빛이 지니는 불가사의한 힘에 매료되어 왔다. 박현주와 황금빛과의 만남은 초기 이태리 르네상스의 승려이자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의 성상화를 모사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어졌으며 모사 작업의 가운데 이러한 선명한 색채와 황금의 빛이 있었다. 박현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물이 지니는 일류젼과 실체의 문제에 항상 의문을 품어왔다. 사물이란 외부의 빛에 의해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물의 실체란 사물 내부에서 발하는 빛에 의해 더욱더 명확해 진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실체로써의 빛을 내적인 빛이라고 이름짓고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지만 사물의 실체는 영원히 도달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적인 빛에 서서히 다가가는 과정이다”

내적인 빛 즉, 내면의 빛이란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빛의 입자가 지니는 중량의 문제를 벗어나 사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고유의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박현주의 INNER LIGHT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이 지니는 내적인 빛의 힘과 마찬가지로. 회화적 공간을 빌려서 성스러운 종교적 공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현주의 나무 상자의 작품은 언뜻 보면 20세기의 미니멀 아트의 요소를 강하게 풍기지만, 작품의 내용은 15세기 초기 르네상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를 부활시켰으나 박현주는 오백년간의 시공을 건너뜀으로써 르네상스의 빛을 현대에 재생시키면서 현대의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Art 2000년 2월호

Art 2000년 2월호 – focus : 박 현주전 1999.12.21~2000.1.7 금산갤러리

 : 강태희 (미술사가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황금큐브의 () ()
 

화가들이 사각형이라는 지지체(support)를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회화사적으로 사각 형태 자체에 대한 천착은 모더니즘의 진행과 궤를 같이 해왔다. 그것은 큐비즘의 사각 지지체에 대한 조응을 단초로 해서 말레비치와 몬드리안을 거쳐 격자(grid)의 행진으로 가시화 되었다. 여기에 재스퍼 존스나 프랭크 스텔라 등이 개입하여 지지체의 형태와 그 위에 그려지는 형상을 겹쳐 하나로 압축시킨 것이 미니멀리즘이다. 이 과정에서 미니멀 조각은 회화에서 오브제로 건너가면서 표면에 남아 있던 최소한의 표정까지도 소거, 객관성-엄밀성-익명성 등을 시대의 새로운 기치로 삼았다. 미니멀리즘은 승승장구 했고 입방체가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사각형과 상자의 행진은 한치의 위축됨 없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이름의 젊은 화가 박 현주가 출발한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사가형을 지지체로 삼고 그 측면을 키움으로써 도널드 저드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수한 물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서 끝난다. 왜냐하면 그의 상자는 금속이 아닌 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에 상당한 시간과 노동이 소요되는 전통기법인 템페라 물감과 금박을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굳이 중세 이콘화의 재료와 기법을 되살리는 것은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자 더 나아가서는 회화의 가능성을 근본부터 재검토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는 모더니즘과 평면 또는 오브제라는 이슈에 대한 관심이 마침 새롭게 접하게 된 템페라 기법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결합된 결과이다.

작업 자체는 지지체의 준비와 화면채색 그리고 측면의 금박작업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됫박 형태의 나무상자-동물성 아교-아사천-젯소-템페라 물감 등을 재료로 삼고 있다. 덧칠하고 연마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은 통상적인 미니멀 조각의 기계적인 공정과는 의도적으로 상치된다. 또한 측면 역시 점토를 깔고 마노로 연마하여 광택을 낸 다음 금박을 입히고 경면이 정반사를 일으키도록 다시 연마한 것으로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수작업이 요구된다.

곱게 연마된 지지대 위에 템페라를 여러 번 반복해서 칠한 화면은 반복된 줄무늬로 분할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빗살무늬의 붓의 궤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미니멀 상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굳이 비교하자면 거미줄 같은 미세한 연필 드로잉이나 보일 듯 말 듯한 미미한 색조의 변화를 구사하는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작업과 다르고, 또 밀랍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미묘한 색감을 만들어 낸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의 작업과도 다르다. 이는 마틴이나 마든이 보여준 극도의 절제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화가의 손이 그 알리바이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상자를 둘러싼 광배의 존재이다. 박현주 작업의 요체는 미니멀 상자에 어울리지 않는 감각적 화면과 그를 둘러싼 금박의 반사광에 있다. 저드가 직육면체의 ‘서랍’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빛과 그림자의 신비한 효과를 끌어냈다면 <내면의 빛>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황금의 광원을 두른 미니멀 상자들인 것이다.

전통 이콘화에서 금박은 성인(聖人) 이미지의 배경이 됨으로써 그림을 성역으로 편입시키는 데 비해 박현주가 이를 측면으로 보낸 것은 회화를 세속의 영역으로 되돌리고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금박은 앤디 워홀의 황금 마릴린 먼로 상과도 연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먼로를 둘러싼 값싼 황금 물감이 그의 대중적 위상을, 이를테면 성과 속의 갈등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면 박현주의 금박은 본인이 의도한 대로 쉽게 속화되지 않는다. 우선 황금은 천민자본주의의 오랜 세속화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그 광채의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잃지 않은 광물이다. 더구나 이들은 적절한 반사를 일으키도록 연마되었고 그 배열도 단순반복보다는 사다리꼴이나 원형 등으로 무리지어 있어 빛을 상호반사하면서 일루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섣부른 성과 속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있으며, 아우라는 거부되기보다는 머물러 있음으로써 풍부한 표정과 음색으로 ‘불온하게’ 속삭이고 있는 화면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검정 큐브의 이런 난처함이 백색 장방형 큐브로의 변화를 유도했는 지도 모른다. 최근작에 속하는 이들 작품은 그 길이도 불규칙적인데 붓자국과 줄무늬가 사라진 백색 화면은 더욱 촘촘해진 반사광과 더불어 실물과 일루전의 구별이 어려운 빛의 덩어리가 되어 있다.

포화 상태에 이른 미니멀리즘에 박현주의 작업은 하나의 의미있는 뒤틀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그 상자를 더욱 비워 갈지 아니면 채워 갈지에 대한 선택에 달려 있다.

마이니찌 신문

마이니찌 (매일)每日 신문 석간 문화면 -비평과 표현 1999년 11월 18일 목요일
 
박현주의 작품에서는 빛에대한 강한 집착이 느껴진다. 빛의 효과를 포착한 인상파화가들을 연상하지 않아도 빛은 표현자 들에 있어서 창작 동기를 불러 일으켜 왔다. 지난 번 전시에서 박현주는 작품에 큰변화를 가져왔다. 흑연이 지닌 금속성의 광택에 의한 약동하는 화면에서 작은 입방체에 금박을 붙여 단일한 갯수가 아닌 복수가 벽면에 걸리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전시장의 조명으로 반사되는 금박의 빛은 마치 황금빛으로 벽면을 덮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박의 면은 마치 거울면이 될 때까지 정성들여 갈고 닦음으로써 비로서 들어나는 빛이라는 점이다. 중세의 이탈리아의 고전기법을 습득해온 화가들은 때로는 장엄함과 장식적인 효과로 다가오는 금박을, 혹은 즉물적인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금박을 從으로, 빛을 主로 인식해왔다. 금박을 입힌 가늘고 긴 막대가 벽면에 피라미드 형태로 설치된 이번의 신작 (inner light)은, 흰벽면에 반사된 빛 그 자체가 보는이의 시각을 끌고 있다. 특히, 상하의 막대사이의 가늘고 긴 공간은 상하에서부터 반사되는 빛이 조화되면서 다양한 드라마가 생겨나고 있다. 피라미드라는 특이한 형태, 게다가 금박이라는 종교적 분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와 연결되면서 그 드라마에는 어딘지 신비적인 정감이 들어난다. 보는 이의 시선을 현혹하고 마음을 흔드는 빛의 일루젼을 작가는 포착하고 있다. 1968년 서울생, 27일까지 동경도 중앙구 긴자 3-8 고바야시 화랑 (03-3561-0515) 이시까와 겐지

 

毎日新聞-夕刊 美術  朴 昡 姝 展(Park, Hyun joo)より
1999年(平成11年)11月18日 木曜日

光に漂う神秘的情感

光への強い関心を、 朴 昡 姝の作品からは一貫して感じ取ることができる。光の効果をとらえるために描いた印象派の画家を思い浮かべるまでもなく、光は表現者たちについえぬ創造への動機を与え続けるのだ。前回の個展で、朴は大胆な変化を試みた。黒鉛の持つメタリックな光沢が勇躍する以前の絵画から、金箔を張った小さな立方体を複数並べた半立体へと表情を変えた。会場のライトに照らし出された金箔は、まさに黄金色の光で壁面を覆った。もっともその光が、金箔の表面が文字とおり鏡面になるまで丹念に研磨された末に初めて生まれる光であることは特筆されていい。この中世イタリアの古典技法に習熟する作家は、しばしば荘厳さや装飾的効果で語られる金箔を、あるいは即物的な存在感が強調される金箔を“従”とし、光を“主”としたのである。金箔を張った横長の角柱が壁面に平ピラミット形に設置された今回の新作Inner Light で、光はその存在を見る側の視覚にいっそうアピールする。とりわけ上下の角柱に挟まれた細長い空間では、上下から放たれた黄金色の光が重なり合い、共鳴しあって多彩なドラマが演じられる。ピラミッド形という特異な形態、さらに金箔という時に宗教的雰囲気を誘う素材とも絡み合って、そのドラマにはどこか神秘的な情感が漂う。まさに見る側の視線を幻惑し、心を揺さぶる光のイリュージョンを、作家は獲得しつつある。
(文化部 記者 石川 健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