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용 빛의 회화

‘빛의 회화’의 자기 치유(治癒) 담론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교수)

 
1.
지난 십수 년 간 박현주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매우 간결한 색면들로 구성된 일련의 구성적 질서였다. 그 질서란 거의 어떤 예외적인 흐트러짐도 허용되지 않는, 규칙적인 배열과 일정한 간격에 의한 엄격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각각의 색면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질서는 너무 완고해서 모든 표현행위가 종료된 이후의 안정기를 보는 듯도 하다. 어떻든 박현주의 세계는 어떤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하며 우연적인 상황에 대한 최대한의 조정과 억제라는 측면에 의해 이루어진다.
부드럽거나 강한 톤의 수 개나 수십 개, 또는 일백 개 이상의 단위 색면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하나의 구성체가 바로 박현주의 작품이다. 즉 박현주의 것은 언제나 각각 독립적인 수개나 수십 개의 조각인 동시에 하나다. 그렇더라도, 그것의 궁극은 ‘설치(installation)’ 보다는 각각의 단위 오브제들과 그것들의 규칙적인 배열이 만드는 구성적 질서에 입각한 회화의 변주나 확장으로 보는 것이 옳다. 박현주의 세계는 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분이 색면추상의 어떤 논리적인 확장, 즉 모더니즘 회화정신의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의 세계를 진정한 그의 세계로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그 각각의 ‘단위-색면’들은 벽면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는 일정한 높이를 지닌, 옆으로 긴 장방형의 신체의 사방 옆면들에서 반사해 내는 빛의 화려한 변주들이다. 그 반사된 빛은 눈이 부시게 현란하며, 각 단위 색면들의 사이공간을 매우고 있다. 그 변주는 물론 각 단위 색면들의 측면 재질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것은 빛의 반사를 원활히 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진 금박이었으며, 최근에는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일련의 동합금이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반사되는 빛의 변주들은 단위 오브제에 조사된 빛의 질과 양, 원근, 각도를 반영하면서, 그리고 벽 위에서 단위 색면들의 강렬한 원색들과 뒤섞이면서 경이로운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은 마치 넘실거리는 황금빛, 또는 순은색의 바다와 그 사이에서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으로 돌출된 색채의 섬들 간의 강렬한 상호작용이다. 이렇듯, 실체와 비실체, 오브제와 탈오브제, 색과 빛 같은 상충하는 질서의 공존이 조율해내는 변증은 일상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경이롭고 풍요로운 것이다.
박현주의 빛은 단번에 우리를 사물의 너머, 초현실의 문턱으로 안내한다. 그 빛은 돌출된 입방체와 강렬한 채색의 주변에 낮게, 그리고 조용히 자리하면서 그것들의 물성을 완화하고, 어떤 ‘사유적인’ 차원을 매개한다. 그렇더라도, 이 빛은 예컨대 렘브란트의 천정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직사광선과는 다르며, 사물 또한 그 구제를 기다리는 융통성 없는 가련한 3차원인 것만도 아니다. 빛은 사물을 부드럽게 스치고, 사물은 빛의 작용을 매개한다. 여기서 빛이 진정으로 초월적일 수 있는 것은 그 빛이 사물에 의해 육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일정부분 사물화된 빛, 사물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각 단위 색면들의 구성들 또한 그 자체로서도 매력적인데, 그 매력은 빛의 개입에 의해 전혀 퇴색되거나 둔화되지 않는다. 물성은 후퇴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어떤 초현실의 기반이 된다. 사물은 빛의 동반자가 되고, 빛은 색의 수준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그의 동경대학 재학시절 그가 속했던 아틀리에에서 서구의 옛 거장들, 예컨대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상 등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가능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 성상의 모사실습거치면서 …나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회화에서의 빛의 효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박현주)
2.
연구 끝에 그는 빛을 회화의 세계로 초대해 들이는 한 방식을 발견했는데, 바로 회화적 질서를 교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지지하는 것으로서 빛이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반사광의 어른거림이 하나의 강렬한 원색을 에워싸도록 함으로써, 색과 빛이 동등한 차원으로 하나의 평면 위에 공존하도록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정술했듯, 여기서 ‘빛(光)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면서 그 사물의 색(色)으로 육화(incarnation)된다. 이 빛은 사물의 기억과 흔적에 의해 끊임없이 조율되는, 일종의 ’색 반사‘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는 예컨대 댄 플라빈(Dan Plabin) 같은 작가의 경우처럼 외부의 전기적 요인에 기대지 않으면서 빛을 색화할 수 있는 매우 시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직육면체 상단면의 정교한 채색과 차분하고 부드럽게 그 주변을 감싸는 이 색과 빛의 공존과 조합, 반복에 의해 박현주의 것은 매우 복합적인 차원의 회화적 이마주로 귀결된다. 그 자체 안에 모더니즘 회화론의 도그마를 해독하는 기제로서 빛이라는 요인에 의해 새롭게 재활된 회화의 모습이랄까. 아니면, 자기 안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요인에 의해 부단히 새로워지는 ‘빛의 회화’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빛은 회화적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 통제와 조정이 가능한 회화의 내부요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계몽주의적 의미의 순수회화와는 그 궤도가 전혀 다른, 새롭게 해석되고 감상되어져야 할 회화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가 그 빛을 일컬어 ‘생명의 빛’이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부드럽고 차분한 빛으로 인해 그 안에 자신을 능가하는 요인을 내포하도록 허용하는, 전혀 새로운 회화정신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박현주의 확장된 회화는 화려하면서 단정하고, 단정하면서도 풍요롭다. 하지만 그 문학적 절제는 시각적 축제를 더욱 고조시키는 조건이 될 뿐이다. 말을 아낄수록, 더 깊이 주제와 만나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많은 단위 색면들이 보여주는 질서정연한 배열은 그 자체로 숙연하지만, 그 숙연함은 무겁고 메마른 질서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의 세계는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그것이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밝고 격정적이며 조용한 활력이 넘쳐난다. 메말라 보이는 기하학적 질서는 활력이 넘치는 이마주를 위한 반어법으로 작용한다. 박현주의 세계는 성실하게 전통적 회화정신에서 출발하지만, 기꺼이 회화를 넘어설 뿐 아니라 회화의 치유로 되돌아온다.
각각의 단위 색면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은 여전히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강렬하다. 이 점에 있어 작가는 이제까지의 맥락을 반듯하게 유지하고 있다. 색면을 단위로 하여 다양한 변주와 확장을 모색하는 태도와 방법론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각각의 단위 색면들에선 분명한 변화가 목격되는 데, 재질감에 부합하는 보다 정교한 채색을 위해 스프레이 작업으로 채색을 완료한 점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몇몇 색면에서 착시를 일으킬 만큼 정교한 명암상의 변주가 눈에 띠는 것 또한 그렇다. 그러한 시각효과로 인해 그것은 매우 강한 입체구조의 일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세계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밟아갈 것인가를 가늠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